포이칼란 (Po-i-Kalyan) 페르시아어로 '위대한 자의 발아래'라는 뜻이며 부하라의 상징인 칼란 미나렛 주변에 위치한 이슬람 종교 단지로,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하던 당시 사원이 위치해 있던 장소이기도 했다. 현재는 12-16세기 사이에 지어진 칼란 모스크, 미르 이 아랍 마드라사 그리고 칼란 미나렛으로 단지가 구성되어 있다. 1. 칼란 미나렛 (Kalyan Minaret) 중앙아시아 최초 투르크계 이슬람 국가였던 카라한 왕조 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이슬람 전에도 이 터에는 탑이 있었는데 초기의 탑은 불교나 조로아스터교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카라한 왕조 시대에 이슬람교도들에게 하루 다섯 번 기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127년에 지어졌다. 칼란은 페르시아어로 '크다'이라는 뜻이며, 미나렛은 '등대'라는 뜻이나 실질적인 아랍어 어근 '불'이라는 뜻으로, 이슬람 이전 조로아스터교에서 사용된 '불 탑'의 목적과 같이 이전부터 종교적인 목적에서 사용돼 파생된 것을 알 수 있다.
46.5미터에 달하는 이곳은 한때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았으며, 몽골 제국의 침략에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로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 마고키 아타리 사원 및 나마즈가흐 사원 (Namazgah Mosque)), 칭기즈칸이 부하라 점령 후 당시 가장 높았던 칼란 미나렛을 보다 투구를 떨어졌는데, 이슬람 누구도 하지 못한 것을 이 미나렛이 했다고 하여 이에 대해 감탄해 이 건물은 파괴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다.
미나렛은 여러 시대에 걸쳐 종교적 기능, 카라반의 이정표로 등대의 역할, 군사 목적의 망루 역할 및 법령, 예배 시간 등을 알리는 데 사용되는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으며, 20세기 초반까지 미나렛 꼭대기에서 던져지는 공개 처형 장소로도 사용돼 죽음의 탑이라고도 불렸다. 2. 칼란 모스크 (Kalyan Mosque) '큰 사원'이라는 뜻인 칼란 모스크는 부하라 칸국 시대인 1514년에 지어진 건축물로, 카라한 왕조 시대 지어진 모스크 부지에 지어졌는데, 카라한 왕조 전에는 칼란 미나렛과 동일하게 불교 혹은 조로아스터교의 고대 사원의 터가 있던 곳이다. 당시 사마르칸트 비비하눔에 이은 두 번째로 큰 사원이었는데, 최대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로 티무르 시대의 건축 스타일이 묻어나 측면에 두 개의 푸른색 돔을 뽐내고 있다. 3. 미르 아랍 마드라사 (Mir-i-Arab Madrassah) 부하라 칸국 시대인 1536년에 건설된 '아랍의 자산'이라는 뜻을 가진 미르 아랍 마드라사는 당시 건설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고자 페르시아인 포로 3,000명을 팔았다고 전해진다. 소련 시절 강력한 이슬람 탄압에도 불구하고유일하게 이슬람 교육 기관으로서 사용을 허가한 상징적인 장소인데, 지금도 유일하게 신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방문 당시 미르 아랍 마드라사는 현재도 사용되고 있어 못 볼 것을 예상했지만 칼란 모스크도 수리 중으로 인해 입구에서 칼란 미나렛만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봐도 꽤 높고 아름다운 곳인데, 13세기 몽골 사신의 죽음 소식을 듣고 분노해 곧장 호레즘 왕국으로 말을 달려 멸망시킨 칭기즈칸에 있어서도 당시 이 건물은 매우 아름다워 부수지 말라고 하지 않았을까?
비록 모스크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지만 노을이 지고 있을 시간에 가서 푸른 하늘과 불그스름한 배경의 포이칼란을 모두 카메라 담을 수 있었다.
칼란 미나렛과 모스크
미르 아랍 마드라사
사막의 도시답게 노을로 붉게 물든 부하라의 모습은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는데, 이슬람 전후의 유적이 공존하는 곳이라 그런지 마치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불과 같이 유독 붉다고 느껴졌다.
진단 (부하라 감옥)
진단 (Zindan) 페르시아어 '감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진단은 부하라에 있는 두 개의 감옥 중 한 곳이었는데, 한 곳은 아르크 성, 다른 한 곳은 샤흐리스탄 (Shahristan), 즉 부하라 도심 북서쪽에 있는 에미르의 감옥이다. 18세기에 지어져 20세기 초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는데, 샤리아법에 따라 주로 채무자와 종교 규정 위반자가 수감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부하라 토후국 시대 감옥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요금: 20,000 so'm
진단은 아르크 성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정면에서 본 아르크 성의 모습과는 다르게 부하라 감옥으로 가는 길에서 보이던 성벽 뒤편은 아직도 복원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마을 안쪽에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방문 당시 사람이 없었다.
아르크 성과 같은 외관을 가지고 있다
진단 내부에는 부하라 토후국 시절 감방들과 이를 관리한 경비원 공간이 박물관으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규모가 크지 않아 금방 둘러볼 수 있다.
비교적 형벌이 낮은 채무자 감방에서는 이렇듯 편한 옥살이를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옆 방에는 당시 사용했던 물건과 죄수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채무자 감방당시 사용했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속 죄수들의 모습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람 모습과는 사뭇 달라 터번이나 수염을 기른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두 번째 사진의 죄수는 6.5미터 감방에서 오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포스가 남달랐는데, 당시 사형이나 종신형을 받은 사람만 이렇게 쇠고랑을 찼다고 해 기억에 남았다.
Zindan (traditional Central Asian prison), with inmates looking out through the bars and a guard with Russian rifle, uniform, and boots, likely in Bukhara, Uzebkistan] by Sergei Prokudin-Gorskii1905-1915, фотограф Сергей Прокудин-Горский
경비원 방에는 당시 부하라 군인들이 사용했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0123
채무자 감방 외 6.5미터 아래에 있는 이 감방은 'Bug-pit (벌레 구덩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구멍 사이로 벌레나 전갈 및 설치류 등을 머리 위에 쏟아부어서 그렇다고 한다.
내려가는 방법 또한 6미터의 밧줄을 통해 내려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최악의 감방이지 않았나 싶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과거 부하라 토후국 시절의 이슬람 감방 환경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재미가 있었다.
감옥에서 보는 아르크 성
볼로 하우즈 사원
볼로 하우즈 (Bolo Hauz Mosque) 1712년에 요새 맞은편에 지어진 근대 이전의 마지막으로 지어진 건물 중 하나로, 부하라가 소련에 부속되기 전 금요일의 모스크로 사용돼 부하라의 에미르가 기도하러 온 장소이기도 했다. '연못 위' 혹은 '어린이 연못'이라는 뜻을 가진 볼로 하우즈는'40개 기둥 사원'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사원이 연못에 반사돼 40개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과거에는 도심 혹은 모스크 주변에 연못을 만들었고 시민들이 이를 통해 물을 손쉽게 공급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소련 시절 질병 전염 등의 이유로 대부분의 연못을 메꾸다 나중에 다시 복원돼 현재는 볼로 하우즈를 아름답게 비추고 있다.
부하라 요새 바로 맞은편에 있는 볼로 하우즈는 접근성 때문인지 에미르가 기도하러 온 장소였다고 한다. 현재는 연못에 비치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데, 바로 앞에서 밝게 빛나서 그런지 부하라 요새에서도 특히 눈에 띄었다.
앞에 있는 연못에 반사돼 '40개 기둥 모스크'라고도 불리는 볼로 하우즈의 연못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녹차라떼였는데, 왜 소련시절에 대부분의 연못을 메꾸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르크 성 안에 있는 양식과 동일하게 목조로 기둥을 지탱해서 그런지 몇 세기 전의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1917년도에 증축될 때 만들어진 거라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주변을 보면서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에 한 할아버지가 나오시면서 기도하는 사람 없으니 와서 사진 찍고 가도 상관없다고 말씀해 주셔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가 보았다.
은은하게 불빛이 공간을 비추고 고요해 아늑하다는 느낌과 함께 유독 성스러운 느낌을 받았는데, 에미르가 왜 이곳에서 예배를 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