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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이스탄불 (Istanbul)

[튀르키예 - 이스탄불5] 히포드롬 광장 / 아야 소피아(엘베다 투어2)

by 떠나볼까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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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5일 차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를 오며 지나왔던 히포드롬 광장으로 다시 나왔다.

현재는 일반 광장으로 이용되고 있어 오벨리스크를 제외한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오벨리스크만 없다면 역사가 없는 일반 광장인 것처럼 느껴졌다.

 

술탄 아흐메트 광장(히포드롬 광장)
현재는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라고 불리는 히포드롬 광장은 과거 비잔틴 시절 경마장으로 스포츠 또는 주요 국가행사가 개최될 때 사용되던 장소였다.
고대 그리스어 히포드로모스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인데, 고대 그리스어로 히포드로모스는 히포스(말)와 드로모스(길 또는 경주)를 합친 말로 경마장을 의미한다. 로마에서는 키르쿠스(Circus)라 불렀는데, 오늘날 서커스의 기원이 된다.

과거 비잔틴 시기에는 10만 명까지 수용 가능한 규모였으나, 오스만인은 경주하는 문화를 즐기지 않아 자연스럽게 광장으로 변모돼 행사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영화 '벤허'에서 전차 경주 장면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며, 비잔틴 시기였던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통치 당시 '니카의 난'을 일으킨 폭도들을 진압 후 수 만 명을 처형한 장소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네 마리의 말 동상이 스피나(경기장 가운데에 중앙 분리대로 주로 기념비나 분수가 장식되어 있는 공간)에 함께 전시되어 있었으나 4차 십자군 원정 당시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며 약탈해 가 현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스피나 부분에 전시되던 장식은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플라타이아의 트라이포드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오벨리스크 등 세 개의 기념비만 남아 있다.

콘스탄티노플 복원도, 경기장 가운데 스피나 부분에 다양한 장식의 기념물들이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 아치 위에 히포드롬의 말 돌상이 있다(외부에 있는 것은 복제품으로 진품은 박물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새로운 수도로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념하고 도시를 새로 장식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전역에서 기념비적인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히포드롬 광장을 꾸몄지만 현재는 세 개만 남아있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현재는 테오도시우스로 불리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는 유일하게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는데 357년 콘스탄티누스가 즉위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카르나크 신전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왔고 390년에는 테오도시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왔다고 한다.

 
본래 높이는 30미터였으나 운반 과정에서 하부가 파손돼 현재 18.45미터 밖에 안 되며, 테오도시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온 뒤에는 하단부에 그의 업적을 나타내는 부조를 새긴 대리석으로 오벨리스크를 받쳤다.
 
로마의 영향력이 미쳤던 곳을 여행하면 곳곳에서 오벨리스크를 구경할 수 있는데, 당시 로마인들에게 있어서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국가에서 가져온 전리품으로 생각해 자부심을 느꼈겠지만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아픈 역사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플라타이아이 트라이포드(Plataeae Tripod)
꽈배기처럼 생긴 이 트라이포드는 기원전 5세기 우리에게 유명한 영화 중 하나인 '300'의 테르모팔레 전투(기원전 480년) 후 그다음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3차 페르시아 침공으로 최대의 지상결전에서 그리스 군이 승리하며 페르시아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방패, 갑옷 등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세계의 도시였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두었으나 콘스탄티누스가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본래 원기둥에 세 개의 뱀 머리가 황금 가마솥을 떠받드는 모습이었는데 황금 가마솥은 델포이 신전에서 가져왔을 때부터 없어져 있었다고 하며, 18세기에는 뱀 머리 3개가 모두 부러져 유실되었다 19세기 중반 세 개의 뱀 머리 중 윗턱 한 점이 아야 소피아 주변에서 발견돼 현재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트라이포드의 뱀 머리 중 일부

 
안타깝게도 현재 완벽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유실되기 전 모습은 오스만 제국 시절 그림에서 볼 수 있다.

히포드롬 광장에서의 술탄 행렬도(1582년)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세 기둥 중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콘스탄틴 오벨리스크는 10세기 콘스탄티노스 7세가 세운 오벨리스크로 원래는 청동판으로 덮여 있었다고 하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원정군에 약탈돼 벽돌만 남아 있다.


히포드롬 광장을 끝으로 오전투어가 끝났고 술탄 아흐메트 광장 트렘역 주변에서 점심 시간을 가졌다.

엘베다가 추천해 준 식당 중 한 곳으로 갔는데 현금만 받지만 개인적으로 맛있어 튀르키예를 떠나기 전 또 오려했으나 현금이 없어 못 간 곳이었다. 

현지인에게도 맛집으로 유명한 타리히 술탄아흐멧 쿄프테지시


맛있는 점심을 먹은 뒤에는 바로 앞에 있는 아야 소피아로 이동했다.

당시에는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어 무료 입장이 가능했지만 기도 시간 때문에 줄이 길게 있었으나 기도가 끝나자마자 긴 줄은 순식간에 사라져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야 소피아(하기아 소피아)
건축학상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아야 소피아는 '신성한 지혜'라는 뜻으로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최초 건립,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 시기인 360년에 완공되었으나 두 차례 소실된 뒤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으로 재착공, 537년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아야 소피아가 완공되었다.

중앙에 있는 돔 지붕(펜던티브 돔)을 지지하기 위해 주변에 작은 돔을 연결한 중앙 집중식 구조로 현존하는 대표적 비잔틴 건축 양식이라 할 수 있는 아야 소피아는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기둥과 대리석을 들여왔는데, 과거에는 기둥이 하나의 전리품으로 여겨져 로마,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이집트의 태양의 신전, 레바논의 바알베크 신전 등 여러 신전에서 기둥을 가져와 서로 다른 크기와 색깔 그리고 연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총대주교구이면서 비잔틴 제국의 황실 성당으로 사용돼 제국의 중대 의식이나 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되었으며, 불가침 영역으로 범죄자들의 피난처 역할도 했으나 13세기 4차 십자군 원정 당시 약탈당했으며 반세기 동안은 라틴 총대주교 장소로 사용되었다.

비잔틴 시대 건축물의 대표적 표본인 아야 소피아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기존에 있던 모자이크는 회반죽으로 덮이면서 모스크로 개조됨과 동시에 이스탄불 최초의 황실 모스크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시대별 새로운 첨탑이 추가돼 각기 다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입장료: 25유로( 2024년 1월 15일부터)

 

이번 튀르키예 여행을 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아야 소피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로마에서 콜로세움으로 들어갔을 때의 기분처럼 들떴다.

 

서로마의 상징적인 문화유산이 콜로세움이라면 동로마는 아야 소피아로 가히 말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 있는 장소에 오게돼 뜻깊었고 튀르키예 여행 중 식당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목적을 갖고 재방문한 곳이었다.

외벽에 버팀목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밖에 있는 네 개의 첨탑(미나렛) 영향인지 모스크처럼 보였던 아야 소피아는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이 건설되기 전까지 약 1,000년 간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외부와는 다르게 내부는 성당임을 알려주는 모자이크와 로마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재건 후 “솔로몬, 내가 그대를 이겼도다“라고 말할 정도로 예술적 가치가 높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 책을 든 채로 엎드려 있는 황제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는 예수. 요한 복음서 20장 19절 '평화가 너희와 함께'와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으며, 양 옆으로는 성모 마리아와 대천사 가브리엘이 있다.
남서쪽 출구 모자이크, 유스티니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사이에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 모습

 

스페인 코르도바에 있는 메스키타가 모스크에서 성당으로 개조되었다면 반대로 아야 소피아는 성당으로 사용되다 오스만에게 함락된 뒤 모스크로 개조돼 사용되고 있다.

뿌리가 같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정복에 대한 과시용으로 인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두 집단 모두 ’공존‘을 택함으로써 다양성의 수용에 초점을 뒀다는 것이고, 그러한 수용성으로 인해 길게 존속하지 않았나 싶다.

 

다른 한편으로는 메흐메트 2세는 이러한 아름다움과 로마의 카이사르 칭호를 모두 유지하고 싶어 회칠하면서까지 모스크로 바꾸지 않았을까하는 합리적인 추측을 해본다.

가려져 있는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정숙함 속에 미흐랍 방향을 보며 기도하고 있는 무슬림과 밖에서 관람하는 관광객들의 조화는 이스탄불에서는 흔한 모습이었다.


현재는 화려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블루 모스크)와는 다르게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에 있는 회칠을 벗겨내면서 손상돼 듬성듬성 하얀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아야 소피아는 당대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유명해 수많은 동방정교회, 로마 가톨릭 그리고 이슬람 사원이 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4차 십자군 원정 때의 약탈당하기 전의 모습이 어땠을지 문뜩 궁금해졌다.

 

현재는 예배 목적으로 온 튀르키예인들에게만 개방되어 있는 1층에는 소원의 기둥이 있는데 두통이 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곳에 몸을 기댄 후 치유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엄지 손가락을 넣고 360도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방문했었을 당시에는 코로나 여파 때문인지 막아져 있었다.

두통을 없애달라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소원이 이뤄져서 소원의 기둥이라 불리는 것일까?


황실의 성당으로 쓰인 만큼 곳곳에는 비잔틴 황제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중 옴팔리온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황제의 즉위식 때 앉았던 장소라고 한다. 

옴팔리온,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될 때 이용하던 공간

 

아야 소피아는 천 년은 족히 넘는 시간 동안 두 제국의 황실 성당으로 사용된 만큼 역사가 깊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다.

 

투어와는 별개로 어두울 때의 아야 소피아를 보고 싶어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 다시 왔는데, 낮에 봤을 때와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민바르(설교단)

 

지금은 박물관으로 바뀌어 외국인 관광객은 2층만 관람할 수 있게 바뀌었는데, 오히려 모스크였을 때 방문하지 못한 2층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중에 이스탄불을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가기 전 아야 소피아에 대해 충분히 알아본 뒤 역사 배경을 이해하며 보고 싶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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